<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소설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유명한 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위의 소설집은 동기의 독후감을 보고 관심이 생겨 종이책으로 사서 읽었는데,
모든 챕터가 재미있고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까워 정말 아껴 읽었다.
그래서 지구 끝의 온실도 기대를 갖고 읽었고, 21년 밀리 독서 대상 '올해의 책' 답게 흡입력이 굉장했다.
0. 인상 깊은 구절들
- 당장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라면 누구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엄마의 말대로 아영 자신이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이어서 그런 것일까.
-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그거야. 싫은 놈들이 망해버렸음 망해버렸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거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내가 망하지 않는 꼴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고.
- 희망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상승할 때는 의미가 있지만, 다 같이 처박히고 있을 때는, 그저 마음의 낭비인 것이다.
-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 수년 뒤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삶만을 생각하는, 그러나 그 내일이 반드시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데에서 오는 매일의 성실함.
- 지수는 레이첼에게서 어떤 종류의 호의를 유도해내고 싶었다. 단순히 거래에 기반한 관계가 아니라, 호의적인 감정에 기반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레이첼이 반대로 선언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수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 그는 정말로 지수를 '옆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지수가 초래한 것이었다.
-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평생 궁금해하기만 하다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1. 소설의 시대, 상황적 배경
소설은 5부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으며, 과거(2050년 후반, 더스트폴 시기, 2부+3부+4부 일부)와
현재(더스트폴 한참 이후, 1부+4부 일부+5부) 왔다 갔다 하며 이어진다.
과거 이야기는 더스트 내성종인 '나오미'와(2부+3부) 로봇 정비사 '지수' (4부 일부)시점에서,
현재 이야기는 식물생태학자인 '아영'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과학 기술이 지금보다 더 발전한 미래의 지구에서 2055년에 '더스트폴'이라는 재앙이 발생한다.
더스트폴로 인해 인류의 대부분이 죽고,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돔시티를 구축해 생명을 이어간다.
이 와중에 더스트에 내성이 있는 일부 인류가 생체 실험 대상이 되는 등 끔찍하면서도 다소 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초반에 죽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는 삶이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삶이 현재진행형인 사람들이 지금도 어딘가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소설에 몰입하다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야생에서 생존력 0일 것 같은 상태가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2. 지수와 레이첼의 관계성
지수는 로봇 정비사로, 더스트폴 이전 사이보그 연구원인 레이첼의 팔을 수리한 일로 둘이 처음 만났다.
더스트폴 이후엔 지수가 여러 돔을 떠돌다가 레이첼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지수는 레이첼의 신체를 정비해 주고 레이첼은 지수에게 분해제(체내 더스트를 해독해 주는 약)를 제공하는 것으로
둘의 공생 관계가 이어진다.
이야기가 한창 진행될 때에는 레이첼은 그저 무심하고 지수가 레이첼에게 일방적인 흥미? 호기심? 아무튼
어떤 감정을 느껴 레이첼의 감정을 제어하는 메모리칩 기능을 건드렸는데,
이후 레이첼이 지수에게 '끌림을 느낀'다고 하며, 지수를 옆에 계속 두기 위해 연구 범위를 제한한다.
이에 지수가 레이첼의 끌림은 자신의 고의에 의한 것이라 고백하고, 레이첼은 지수에게 떠나라고 한다.
그러나 레이첼은 지수를 온실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흥미를 느꼈기에 지수의 제안에 응한 것이고
어쩌면 자신의 감정은 조작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진실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다가
결국엔 무엇이 진실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내에서 레이첼이 기계에 가깝기도 하고, 성격도 무심하게 묘사되지만
레이첼은 항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발언을 한다.
ex) '너에게 끌림을 느껴', '그건 내 유일한 선택지였어.'
반대로 지수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확고한 사람처럼 말하지만
혼란스럽고,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묘사된다.
ex) '온실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 가야 할 곳은 없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무엇을 바랐었는지 지수는 이제 알 수 없었다', '그게 좋았던가?'
이야기 흐름 상 지수가 레이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감정적으론 반대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3. 별점
5점 +a
난.. 현대소설에 별점이 후한 편이다.
재앙과 관련된 어두운 내용을 담담하게 표현한 문체도 좋았고,
모스바나의 푸른빛과 마을, 온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져 영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다.